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피로 애그뉴 (문단 편집) === 메릴랜드 주지사 === 애그뉴가 볼티모어 행정관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민주당 조직이 분열되었기 때문이고 볼티모어 시내 민주당 조직이 다시 단합되기 시작하자 애그뉴의 재선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다. 이에 애그뉴는 죽기 아니면 까부러치기 정신으로 메릴랜드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다. 이는 엄청난 도박이었는데, 당시까지 [[재건 시대]] 이후 공화당 당적으로 당선된 메릴랜드 주지사가 딱 4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6년 메릴랜드 주지사의 민주당 후보로 공정주거보장법[* 흑인의 주거 권리를 보장하는 민권법이다.]에 반대하는 극우 인종주의자 조지 P. 마호니(George P. Mahoney)가 선출되자 메릴랜드 주 민주당 조직이 분열되었다. 분개한 일부 민주당원들은 하이먼 A. 프레스먼(Hyman A. Pressman)을 무소속 제3지대 후보로 밀었고 또 다른 일부는 "애그뉴를 위한 민주당원"을 조직해 애그뉴 당선운동을 벌이기까지 한다. 애그뉴는 마호니를 KKK단 후보로 매도했고 "[[쿠 클럭스 클랜|불타는 십자가]]와 밝고 순수하며 용감한 정의의 불꽃 중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라는 노골적인 선거 구호까지 내세웠다. 결국, 모두의 예상을 깨고 애그뉴는 49%를 득표해 40%를 득표한 마호니와 10%를 득표한 프레스먼을 꺾고 메릴랜드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이는 같은 날 치러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된 것과 더불어 공화당이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1964년의 참패]]를 딛고 재기에 성공한 가장 상징적인 승리로 받아들여졌다. 애그뉴는 주지사로서 진보적인 행정을 펼쳤으며, 세금 개혁, 환경 보호, 인종 차별 철폐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NAACP(전미 유색인종 인권 향상 협회)의 지지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극단적인 인종 평등 시위에는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볼티모어 카운티 행정관으로 복무하던 시기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1968년 3월 [[68혁명]]의 불길이 미국으로 옮겨붙어 보위 주립대학교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나자, 애그뉴는 격분해 시위 주모자들을 모두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200명 이상의 인종평등 시위대가 체포되었다. 뒤이은 1968년 4월 볼티모어 폭동 당시에도 주방위군을 동원해 시위대를 과격진압했고, 6명이 사망하고 4,000명이 체포되었다. 심지어 100명에 달하는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들을 소환해 면전에서 비난하기도 할 정도였다. 흑인 민권운동 지지자들은 "우리가 속았다. 이제 그는 [[조지 월리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라고 비난했지만, [[윌리엄 노랜드]] 상원의원을 비롯한 미국 전역의 보수파는 애그뉴를 칭찬했으며 애그뉴는 "법과 질서"를 내세우는 공화당 보수파의 새 영웅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